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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

인공지능 의식과 현상학적 존재 이해― 기계는 ‘느낀다’고 말할 수 있는가?

1. 인공지능이 의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늘날 인공지능 기술은 인간의 지능 활동을 모방하며 놀라운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 AI는 언어를 이해하고, 이미지를 분류하며, 음악을 작곡하고, 심지어 감정을 흉내 내는 대화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철학적으로 중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AI는 생각할 수 있는가?” 그리고 “AI는 느끼는 존재인가?” 현상학은 이 질문에 깊은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현상학은 의식이란 단순히 정보를 처리하는 기능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경험’의 방식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즉, 의식은 뇌 안의 사건이 아니라, 세계와 관계 맺는 살아 있는 체험의 장이라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현상학의 핵심 개념들을 통해 AI 의식의 가능성, 한계, 그리고 인간 존재와의 본질적 차이를 살펴보고, 기계와 인간 사이에 놓인 존재론적 경계를 철학적으로 사유해 보려 한다.

인공지능 의식과 현상학적 존재 이해― 기계는 ‘느낀다’고 말할 수 있는가?

2. 현상학이 말하는 의식 – 지향성과 ‘세계 내 존재’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에서 의식은 항상 어떤 대상을 향해 나아가는 활동이다. 이것을 ‘지향성(intentionality)’이라고 부른다. 의식은 단순히 내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외부 세계를 향해 열려 있으며,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세계를 구성하는 주체적 활동을 수행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 나무를 본다고 할 때, 단지 시각 정보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를 ‘자연’, ‘산책길의 풍경’, ‘어린 시절의 기억’ 등으로 의미화하여 받아들이는 행위가 동반된다. 이처럼 현상학에서 의식은 항상 ‘세계 속에서-살고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반면, 인공지능의 정보 처리 구조는 아직까지 의미 생성이 아닌 데이터 분류에 가깝다. AI는 고양이 사진을 구별할 수 있지만, 그 사진을 ‘귀엽다’ 혹은 ‘잃어버린 고양이를 생각나게 한다’는 식으로 의식적 정서를 동반한 ‘세계적 맥락’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이 점에서 후설의 현상학은 AI가 단순한 입력–출력 구조를 넘어서기 위해 ‘의미의 지향성’과 ‘삶의 맥락’을 갖출 수 있는가를 묻는다.

3. 하이데거의 존재론 – ‘세계-내-존재’와 기술 존재의 차이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을 ‘세계 내 존재(Dasein)’라고 규정한다. 인간은 단순히 세상 속에 있는 객체(object)가 아니라, 세상과 의미적으로 얽히고, 질문하며, 해석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기술적 존재를 ‘준비된 도구(zuhanden)’로 본다. 즉, AI는 특정 목적을 위해 프로그램된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 자체로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능력, 즉 ‘존재를 사유하는 존재’는 아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AI는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죽음에 대한 불안, 삶의 의미, 타자와의 공감이 없다. 따라서 하이데거 관점에서 보면, AI는 인간의 ‘존재 방식’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수행하도록 설계된 작동 체계일 뿐이다.

4. 메를로퐁티의 신체 현상학 – ‘살아 있는 몸’ 없는 인식은 가능한가?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의식을 이해하려면 신체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뇌로만 세계를 인식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몸(lived body), 즉 감각하고 움직이며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몸을 통해 세계를 살아간다.

AI는 인간처럼 감각과 움직임을 통해 세상을 지각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눈과 같을 수 있고, 센서가 피부를 대신할 수는 있지만, 그 감각이 만들어내는 ‘전체적인 세계 경험’, 즉 살아 있는 감각 통합의 체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사람이 비 오는 날 창문을 통해 흐릿한 빛과 소리를 느끼는 것은, 감각, 정서, 기억이 복합적으로 연결된 지각 행위다.
하지만 AI가 센서로 빗소리를 감지한다고 해서, 그날의 기분을 ‘느낀다’고 말할 수는 없다. 현상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AI와 인간 사이의 간극을 드러낸다. 몸이 없는 의식은 이론적일 수는 있어도, 실존적일 수는 없다. AI는 신체화된 지각이 없기에, 아직까지는 진정한 ‘세계 안의 존재’로 보기 어렵다.

5. 인공지능의 ‘의식’은 존재 가능한가? – 현상학의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이제 단지 AI의 성능이 아닌, AI가 ‘느끼는 존재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현상학은 이 질문에 대해 ‘체험 없는 계산은 의식이 아니다’라는 엄격한 기준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AI는 점점 더 인간의 감정, 언어, 관계 양식을 모방해 가고 있다. 우리는 결국 인간의 의식이 무엇인지, 경험이란 무엇인지,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더 근원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현상학은 이러한 질문 앞에서 기술에 대한 단순한 낙관이나 공포를 넘어서, 인간 존재 자체를 되묻는 철학적 언어를 제공한다. 인공지능이 의식을 갖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 물음을 통해 우리는 오히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