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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

간호학과 의료 분야에서의 현상학― 환자의 몸을 돌보는 것이 아닌, 환자의 ‘세계’를 이해하는 간호

1. [서론] 치료는 기술이지만, 간호는 세계와의 만남이다

의료 분야에서 환자의 고통은 단순히 생리적 증상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같은 진단을 받은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삶의 경험과 감정, 태도를 보이는 것은 흔한 일이다. 병은 같아도, 아픔은 다르고, 그 경험의 방식은 개인마다 완전히 다르다. 이런 개인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철학적 접근이 바로 현상학(phenomenology)이다.
현상학은 인간의 경험이 의식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탐구하는 철학이며, 간호학에서 이 철학은 환자의 고통을 질병의 이름이 아니라, ‘의식 속에서 구성된 삶의 방식’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 글에서는 현상학이 간호학과 의료 실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의료인이 어떻게 더 깊은 공감과 윤리적 돌봄을 실천할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2. 후설의 ‘지향성’과 환자 경험의 이해

현상학의 핵심은 의식은 항상 무언가를 지향한다는 개념, 즉 지향성(intentionality)이다.
환자의 경험도 단순히 ‘통증’이나 ‘불편함’이 아니다. 그것은 몸과 삶, 시간, 관계, 죽음에 대한 의식적 해석이 동반된 전체적 경험이다. 예를 들어, 암을 진단받은 환자가 느끼는 고통은 육체적 통증 외에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삶의 의미 상실’, ‘가족과의 단절’, ‘자기 몸에 대한 낯섦’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이러한 감정은 진단명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 사람의 존재 전체에 걸친 현상으로 나타난다.

후설적 현상학은 간호사가 이러한 경험을 단순히 ‘감정’으로 분류하지 않고, 의식 안에서 나타난 세계의 구성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간호란 곧, 몸을 다루는 일이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일’이라는 관점이 여기서 출발한다.

간호학과 의료 분야에서의 현상학― 환자의 몸을 돌보는 것이 아닌, 환자의 ‘세계’를 이해하는 간호

 

3. 간호 실천에서의 현상학적 태도 – 판단을 중지하고 듣기

간호사가 환자 경험을 현상학적으로 이해하려면, 먼저 에포케(Epoché), 즉 선입견 중지의 태도가 필요하다.
환자가 “가슴이 답답하다”라고 말할 때, 그 원인을 분석하기보다, 먼저 ‘그 답답함이 그의 세계에서 어떤 식으로 느껴지는지’를 경청하는 것이 출발점이 된다. 현상학적 간호 실천은 환자의 말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그 말 너머의 세계를 느끼는 태도를 요구한다. 즉, 간호사는 환자의 말과 행동 속에서 드러나는 시간감각의 왜곡, 공간에 대한 인식 변화, 자기 몸에 대한 낯섦, 죽음에 대한 감각 등을 포착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단지 인간적인 친절함을 넘어서, 철학적으로 훈련된 ‘존재 이해의 감수성’을 의미하며, 이는 실제 간호의 질을 높이고 환자 중심적 돌봄을 가능하게 만든다.

4. 환자의 몸은 ‘물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현상’이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몸’은 기계적 신체(object-body)가 아니라, 경험하고 느끼고 고통 받는 몸, 즉 ‘살아있는 몸(lived body)’이다. 이 개념은 간호학에서의 환자 중심 접근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신체 움직임에 어려움을 겪는 환자는 단순히 운동 기능이 제한된 것이 아니라, 공간과의 관계, 타인과의 거리, 시간의 흐름 자체가 달라진 상태에 있는 것이다.
현상학은 이처럼 몸을 존재 방식의 중심으로 이해하며, 간호사가 환자의 움직임, 시선, 자세, 말투를 통해 그들의 세계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를 섬세하게 감지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는 단순한 의료적 처치를 넘어, 몸과 존재 사이의 균형을 회복하는 돌봄으로 확장된다.

5. 현상학은 간호사의 존재도 변화시킨다 – 돌봄의 윤리와 자각

현상학은 환자만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 철학적 사고는 간호사 자신의 존재 방식 또한 성찰하게 만든다. 돌봄이 단순히 매뉴얼에 따른 기술이 아니라면, 간호사는 매 순간 “나는 지금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묻게 된다. 이러한 자기 성찰은 현상학에서 말하는 의식의 흐름과 ‘살아 있는 현재(living present)’에 머무는 훈련이다.
이는 바쁜 임상 현장 속에서도 순간의 경험을 자각하고, 돌봄을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태도’로 바꾸는 전환점이 된다. 결국 현상학은 간호학에서 단지 ‘철학’이 아닌, 가장 깊은 윤리이자 실천의 기술이 된다. 그것은 환자와의 관계를 새롭게 보고, 나 자신의 존재를 다시 구성하게 만드는 깊고 조용한 사유의 도구다.

6. 간호학 연구에서의 현상학 – 경험의 본질을 기술하는 질적 접근

현상학은 간호학 연구 방법론에서도 점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의료와 간호는 전통적으로 양적 연구(quantitative research)에 기반해 왔다. 하지만 인간의 고통, 회복, 돌봄의 경험은 숫자와 통계만으로는 완전히 설명될 수 없는 영역이다.
이 때문에 질적 연구(qualitative research), 그중에서도 현상학적 접근법이 간호학에서 점점 더 활발히 사용되고 있다.

현상학적 간호 연구는 ‘왜’가 아닌 ‘어떻게’를 묻는다. 예를 들어, 항암치료를 받은 환자의 삶을 연구한다고 할 때, 단순히 증상 빈도나 회복 속도를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치료를 받으며 어떤 감정을 경험했는지, 시간은 어떻게 흐르고 있었는지, 몸은 어떤 방식으로 느껴졌는지를 기록하고 분석한다.

이러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구조로 이루어진다:

  • 참여자 선정: 특정 경험을 공유한 집단(예: 말기 암 환자, 조산 경험자 등)
  • 현상학적 인터뷰 수행: 개방형 질문을 통해 개인의 경험 서술 유도
  • 데이터 분석: 후설의 기술적 현상학이나 하이데거의 해석적 현상학 방법에 따라 경험의 구조와 주제 도출
  • 의미의 본질 정리: 여러 참여자의 공통된 체험 양상에서 경험의 본질을 언어로 기술(describe)

이러한 연구들은 실제 간호 실무에 응용되어, 환자의 내면 상태를 더 정밀하게 이해할 수 있는 돌봄 전략을 개발하거나, 돌봄 과정에서 간호사가 느끼는 심리적 소진, 윤리적 갈등 등의 정서적 경험을 구조화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환자실 간호사의 트라우마 경험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 "신생아 사망을 경험한 어머니의 애도 체험" 등은 정량적 데이터로는 절대 접근할 수 없는 ‘의미의 층위’를 드러내는 정성적 성과를 낳는다.

현상학은 이렇게 간호학에서 실무자와 환자 모두의 ‘살아 있는 경험’을 드러내고 정리하는 연구 도구로 발전하고 있으며, 기계 중심의 의료 모델을 인간 중심의 돌봄 모델로 전환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