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우리는 공간 속에 있지 않다, 공간을 ‘경험’하고 있다
사람은 늘 공간 안에 살아가지만, 단지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경험하고 구성하며 해석한다. 좁은 복도는 불안을 유발하고, 넓은 로비는 안정감을 준다. 높은 천장은 마음을 열게 하고, 낮은 천장은 집중력을 끌어낸다. 이처럼 공간은 벽과 바닥, 창문으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공간은 우리의 감각, 몸, 시간 감각, 기억과 감정으로 구성된다.
현상학은 이러한 공간을 단지 ‘물리적 좌표’로 보지 않고, 의식 속에 주어지는 ‘경험의 장(場)’으로 파악한다. 즉, 공간은 눈으로 본 것, 발로 디딘 곳이 아니라 몸이 느끼고, 시간이 흐르고, 의미가 생성되는 감각적·정서적 총체다.
이 글에서는 현상학적 관점에서 공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디자인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런 관점이 건축, 인테리어, 도시 디자인에 어떤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는지를 살펴본다.
2. 공간의 본질은 '느껴지는 세계'다 – 후설과 하이데거의 시선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Edmund Husserl)은 모든 의식은 ‘무언가를 지향한다’고 말했다. 이 지향성 개념에 따르면, 공간 또한 우리에게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의식이 어떤 방식으로 ‘공간다움’을 구성해 내는지에 따라 다르게 경험된다.
이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건축·거주·사유』에서 공간은 단지 비어 있는 곳이 아니라 사람이 ‘거주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장소’라고 강조한다. 하이데거에게 공간은 ‘존재’와 직결된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방에 들어가면 그 공간은 단순한 네 벽이 아니라, 안정감, 외부와의 분리, 사적인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장(場)이 된다.
이러한 관점은 건축가에게 큰 함의를 준다. 건축은 단지 구조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거주하고 살아갈 ‘의미의 틀’을 설계하는 행위다. 현상학은 건축 디자인을 물리적 설계에서 존재와 경험의 설계로 확장한다.
3. 메를로퐁티의 ‘살아 있는 몸’과 공간의 체화된 경험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인간은 세상을 이성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통해 체화된 방식으로 세계를 살아간다고 말했다. 이 말은 공간도 머리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험되고 감각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노출 콘크리트의 차가운 질감, 따뜻한 원목 바닥, 좁은 계단의 경사각,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의 방향은 모두 공간의 느낌을 구성하는 비언어적 감각 요소다. 이 감각은 뇌가 아닌 몸 전체로 받아들여지고 해석되며, 우리는 그것을 ‘집 같다’, ‘불편하다’, ‘탁 트인 느낌이다’ 등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현상학적 건축은 ‘보기 좋은 공간’이 아니라 살기에 적합하고, 경험적으로 설계된 공간을 추구한다.
디자이너는 사용자의 눈높이, 동선, 감각적 선호, 사회적 관계를 고려하여 사용자 몸의 감각을 중심으로 한 디자인 전략을 구성하게 된다.
4. 기억, 정체성, 시간 – 공간은 어떻게 삶의 일부가 되는가?
현상학에서 공간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기억과 감정, 정체성이 얽힌 실존적 무대다. 사람은 특정 공간을 떠올릴 때, 단지 그곳의 구조가 아니라 그곳에서 느낀 감정, 사건, 관계, 냄새, 빛의 방향까지 통합적으로 떠올린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의 방은 좁더라도 ‘안전한 장소’로 기억되고, 어떤 병원의 복도는 고통이나 불안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공간이 단순한 환경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이 퇴적된 삶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현상학적 건축은 이 점에 주목하여, 공간을 ‘정체성이 발생하는 장소’로 바라보고, 사용자가 그 공간 안에서 ‘나’를 감각하고, ‘시간’을 느끼고, ‘타자’를 인식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 이러한 관점은 기억을 설계하는 건축, 애도의 장소, 회복을 위한 환경, 의례와 통과의례 공간 등 정서 중심 공간 디자인에 특히 강력하게 응용될 수 있다.
5. 현상학은 건축을 기술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확장한다
현상학적 공간 디자인은 건축가나 디자이너에게 ‘공간을 만들어내는 존재 구조’를 깊이 이해하라고 요구한다. 단지 구조물이나 미감을 넘어, 삶의 맥락, 존재의 방식, 인간의 감정 구조까지 통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디자인 철학이다.
현대 도시 디자인이 익명성과 표준화에 치우치는 상황에서, 현상학적 접근은 인간 중심의 ‘경험 디자인’ 철학을 되살리는 중요한 대안이 될 수 있다. 특히 학교, 병원, 도서관, 주거 공간, 복지 시설 등 사용자 경험이 중요한 공간에서는 현상학의 관점이 ‘보이지 않는 차이’를 만들어낸다.
궁극적으로 현상학은 건축을 윤리적 실천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공간은 단순히 점유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삶을 이루고 나를 구성하는 ‘감각적 세계’이며, 그 세계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는 건축가의 철학적 책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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