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상학

로만 잉가르덴과 예술의 현상학― 작품은 존재하는가, 나타나는가?

1. 서론: 예술 작품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예술은 인간의 감각과 감정, 사유를 동시에 자극하는 독특한 경험의 장이다. 우리는 소설을 읽을 때, 페이지 위의 잉크가 아니라 등장인물의 삶과 사건을 떠올리고, 음악을 들을 때는 음향 그 자체보다 그 속에 담긴 정서적 흐름을 느낀다. 회화 역시 색채와 선을 넘어서 공간과 감정을 담아낸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술 작품은 단순히 물리적 객체로서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의식 속에서만 현상으로 주어지는 것인가?

폴란드의 철학자 로만 잉가르덴(Roman Ingarden)은 이 문제를 누구보다 철저하게 탐구한 인물이다. 그는 에드문트 후설의 제자로서 현상학의 기초를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예술 작품의 존재 방식에 대해 보다 독립적이고 존재론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잉가르덴은 예술 작품이 단지 감각적으로 ‘보이는 것’이나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구조와 잠재성을 갖춘 존재 양식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그는 문학 작품, 음악, 회화 등의 예술 형식들이 어떤 방식으로 의식 속에서 실현되는가를 체계적으로 분석했고, 그 과정을 통해 예술의 본질에 접근하려 했다.

이 글에서는 로만 잉가르덴의 ‘예술의 현상학’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의 이론이 왜 예술 작품을 단순한 감상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의식 속에서 실현되는 독특한 존재로 해석하는지를 살펴본다. 또한 그의 사유가 후설과 어떤 점에서 다르고, 오늘날 예술 감상과 비평, 그리고 인간 경험의 철학적 토대를 어떻게 풍부하게 만들어주는지를 함께 고찰한다.

로만 잉가르덴과 예술의 현상학― 작품은 존재하는가, 나타나는가?

2. 예술 작품은 다층적 구조를 가진다 – 형식, 의미, 지향의 중첩

잉가르덴의 예술 철학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예술 작품이 단일하고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복합적 구조라는 점이다. 그는 문학 작품을 중심으로, 예술 작품을 구성하는 층위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 언어적 층: 실제 텍스트로 이루어진 물리적 기호의 집합
  • 의미 층: 문장을 통해 전달되는 개념, 사건, 세계관
  • 가상적 대상 층: 등장인물, 사건, 풍경 등 상상된 요소들
  • 형상 및 분위기 층: 묘사 속에 드러나는 정서, 분위기, 암시된 감정

이러한 층들은 각각 독립된 성격을 가지면서도, 수용자의 의식 안에서 통합되어 하나의 총체적 예술 경험을 형성한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층들이 하나의 ‘객체’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 상태로서 존재하며, 독자가 해석하고 감응함으로써 비로소 활성화된다는 점이다.

잉가르덴은 예술 작품을 ‘불완전한 존재’라고 불렀다. 여기서 불완전성은 결함이 아니라 개방성과 실현 가능성을 의미한다. 작품은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으며, 각 수용자의 해석과 감정 상태에 따라 다양하게 실현될 수 있는 구조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예술은 정적(static)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존재한다. 이 구조는 미학, 비평, 해석학의 근거가 되며, 작품이 왜 감상자마다 다르게 ‘현상’하는지를 설명하는 토대가 된다.

3. 수용자의 의식에서 실현되는 작품 – 예술은 경험 속에서만 존재한다

잉가르덴은 후설과 마찬가지로 ‘의식은 항상 무언가를 지향한다’는 원리를 따른다. 하지만 그는 후설이 주로 ‘지향성’을 중심으로 의식과 대상의 관계를 설명한 것과 달리, 예술 작품이 어떤 방식으로 지향된다는 것인가를 더욱 구체적으로 탐색했다. 잉가르덴에게 예술은 수용자에 의해 완성되는 개방 구조물이며, 그 의미는 독자의 의식 행위를 통해 실현된다.

그는 이것을 ‘실현(realization)’ 또는 ‘구체화(concretization)’라고 불렀다. 작품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하고, 수용자가 읽고 듣고 감상함으로써 구체화되어 하나의 살아 있는 현상으로 전환된다. 예를 들어, 소설 속 인물의 목소리, 감정, 배경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독자의 상상과 감정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난다. 음악 또한 마찬가지다. 악보는 물리적인 기호의 집합에 불과하지만, 연주자와 청취자의 해석을 통해 그 안에 담긴 정서와 감정이 드러난다.

이처럼 예술 작품은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구조를 가지지만, 드러난다는 점에서는 주관적이고 체험적인 과정에 의존한다. 이 긴장 속에서 예술은 비로소 살아 있는 현상으로 기능하며, 감상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지속적으로 의미를 갱신해 나간다. 이 구조는 해석학적 철학, 독자 반응 이론, 감각 미학 이론 등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4. 결론: 예술은 객체가 아닌 현상이다

잉가르덴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통찰은, 예술 작품은 하나의 완성된 객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과 해석, 감정과 인식이 결합된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는 후설의 ‘현상에 그 자체로 나아가라’는 태도를 계승하면서도, 예술이 단순히 지향된 대상이 아니라, 존재와 실현 사이에 놓인 구조임을 밝혀냈다. 그의 예술 존재론은 감상자와의 관계, 실현의 다양성, 시간성과 감각의 연속성을 기반으로 예술의 ‘살아 있는 성격’을 설명했다.

잉가르덴의 이론은 단지 철학적 모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디지털 예술, 참여형 콘텐츠, 몰입형 경험 기반 예술까지 포함하는 예술 개념 확장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예술은 여전히 물리적인 형태로 존재하지만, 그것이 ‘작품’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수용자의 감각, 인식, 해석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때 예술은 단순한 대상이 아닌 현상학적 사건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예술을 단지 아름답거나 의미 있는 무엇으로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며, 우리가 그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변화하는지를 사유해야 한다. 로만 잉가르덴은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의 철학적 의미를 새롭게 밝혀냈으며, 우리로 하여금 예술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는 것’으로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