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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

장-뤽 마리옹의 현시현상 — 수여됨의 철학과 새로운 현상학

1. [서론] 현상학은 어디까지 ‘현상’을 말할 수 있는가?

현상학은 ‘현상에 그 자체로 돌아가라’는 후설의 선언에서 출발했다. 이 선언은 철학이 존재를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어떻게 세계가 나타나는가를 분석해야 한다는 방향 전환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현상학은 항상 ‘현상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함께, 현상 너머의 것, 즉 나타남의 조건 자체를 사유하려는 경향을 보여 왔다. 특히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단순히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나 객관적 구조로서의 현상만이 아니라, 차라리 우리 앞에 ‘압도적으로 나타나는 것’, 혹은 주체가 파악하기 이전에 스스로 수여되는 어떤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이 요구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프랑스 철학자 장-뤽 마리옹(Jean-Luc Marion)은 후설과 하이데거를 넘어서는 새로운 현상학적 방향을 제시한다. 그는 ‘지향성’이나 ‘존재’의 구조를 넘어서, 현상 자체가 어떻게 ‘수여됨’으로 주어질 수 있는가를 탐구한다. 이때 말하는 ‘현상’은 단순히 의식에 의해 포착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주체의 능력과 관계없이 스스로 넘쳐흐르며 다가오는 것, 즉 ‘현시 현상(phanomène saturé)’이다. 이 글은 마리옹의 ‘현시현상’ 개념이 전통적인 현상학의 틀을 어떻게 재구성하고 확장하는지를 고찰하며, 그것이 현대 철학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살펴본다.

장-뤽 마리옹의 현시현상 — 수여됨의 철학과 새로운 현상학

 

2. 의식의 한계를 넘는 현상 — '과포화된 현상'의 개념

장-뤽 마리옹은 후설의 지향성 이론에서 출발하면서도, 의식이 대상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전통적인 현상학에서는 의식이 항상 어떤 대상에 향해 있고, 그 대상이 일정한 방식으로 의식에 나타난다고 보았다. 하지만 마리옹은 반대로 의식이 그 대상을 충분히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넘치는, ‘과포화된’ 현상을 이야기한다. 그는 이를 ‘현시현상(phanomène saturé)’, 또는 ‘수여된 현상(phenomenon of givenness)’이라고 부른다.

이런 현상은 대표적으로 예술, 사랑, 죽음, 신성, 계시 같은 개념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한 작품이 너무 압도적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거나 ‘해석’하기보다는 그 앞에서 멈추게 된다. 그것은 ‘보인다’라기보다,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주는’ 현상이다. 마리옹에게 있어서 이러한 현상은 지각의 조건에 의해 제한되지 않으며, 오히려 조건을 초과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즉, 의식이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스스로를 선물하듯 ‘수여’하는 것이다. 이때 주체는 더 이상 중심이 아니며, 오히려 수동적으로 수여됨을 받는 자리에 위치하게 된다.

3. 수여됨(Givenness)의 논리 — 나타남은 인식이 아니라 선물이다

마리옹의 현상학에서 중심이 되는 논리는 바로 “나타남은 곧 수여됨이다.(La donation est le phénomène)”라는 명제다. 이 말은 우리가 어떤 현상을 인식하거나 지각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현상이 그 자체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수여’란 단순히 객체가 주체에게 옮겨지는 일방적 행위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주체가 그 자체로는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어떤 ‘넘침’ 혹은 ‘압도’의 형태로 나타나는 사건이다.

마리옹은 이 수여의 논리를 통해 기존의 존재 중심 철학을 넘어선다. 하이데거가 ‘존재의 드러남’을 말하면서 여전히 ‘존재자(Dasein)’를 중심에 두었다면, 마리옹은 그 중심을 주체도 존재도 아닌 ‘수여됨’의 운동 자체로 대체한다. 이것은 ‘존재 이전의 나타남’을 사유하는 것이며, 철학을 인식론이나 존재론의 틀에서 해방시키는 급진적인 전환이다. 그의 현상학은 더 이상 ‘무엇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왜 그것이 나에게 주어지는가’, 그리고 ‘나는 그것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이로써 현상은 더 이상 대상의 속성이 아니며, 나타남 그 자체가 철학의 출발점이 된다.

4. 결론: 현상학의 윤리적 전환: 수여 앞에서의 책임

장-뤽 마리옹의 현시현상 개념은 단순히 현상학의 기술적 확장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철학의 근본적 윤리적 방향 전환을 요구한다. 주체가 중심이었던 철학을, 이제는 수여 앞에 응답하는 존재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여됨’의 구조는 주체가 ‘이해’하거나 ‘포획’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 응답성(responsivity)을 요구하며, 이는 철학이 단순한 분석을 넘어 윤리적 태도로 나아가야 함을 암시한다.

예술 작품 앞에서, 사랑의 경험 속에서, 타자의 얼굴 앞에서, 우리는 항상 어떤 방식으로든 ‘수여되는 것’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주어지며, 주체에게 ‘응답하라’는 요청을 던진다. 마리옹의 현상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철학이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보이는 것만 말하는 철학’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수용하고 응답하는 철학’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의 수여된 현상은 인간 경험의 극한에서, 우리가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마지막 지평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