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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

나의 하루를 현상학적으로 분석하기― 감각, 기억, 시간 흐름 안에서의 ‘나’

1. 아침: 눈을 뜨는 순간의 세계 경험

아침 7시,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나는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을 바라보며 내 방의 공기와 빛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감각했다. 공기는 약간 서늘했고, 커튼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내 이불 위에 부드럽게 닿았다. 나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몸으로 침대에 누운 채, 천천히 주변의 온도와 조용함을 느꼈다. 눈은 떠 있었지만, 모든 것은 여전히 나를 중심으로 조율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일어난다’는 행위보다, 세계를 다시 맞이하는 감각의 시작을 겪고 있었다. 후설의 말처럼, 의식은 항상 ‘어떤 것’을 향한다. 나는 커튼의 빛을 본 것이 아니라, 그 빛을 통해 하루가 시작된다는 느낌을 경험한 것이다.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 나는 몇 초간, 어제와는 다른 오늘의 감각을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이불의 무게, 발바닥에 닿는 바닥의 차가움, 세면대 앞에 선 내 얼굴, 이 감각들은 ‘같은 일상의 반복’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만 가능한 구체적이고 새로운 체험이었다. 아침은 나에게 단순히 하루의 시작이 아니라, 존재가 다시 이 세계와 연결되는 첫 장면으로 다가왔다.

나의 하루를 현상학적으로 분석하기― 감각, 기억, 시간 흐름 안에서의 ‘나’

2. 정오: 일상의 흐름 속에서 나를 느끼기

오전 업무를 마치고, 나는 커피를 사러 밖으로 나갔다. 햇빛이 건물 벽에 반사되어 내 얼굴을 스치고, 발밑의 그림자는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걸음, 공원의 바람, 차들이 내는 배경음, 이것은 내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자연스럽게 내 의식에 들어왔다. 나는 단지 보고, 듣고, 냄새 맡은 것이 아니라, 이 도시의 흐름과 ‘동기화’되고 있었다. 이 순간 나는 도시 속을 걷는 주체인 동시에, 도시의 일부로 움직이는 하나의 존재가 되었다.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실 때, 나는 내가 ‘쉰다’는 사실보다도, ‘쉼’이라는 감각 자체를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에 집중하고 있었다. 몸은 약간 피로했고, 혀끝에서 커피의 쓴맛이 느껴졌으며, 그 쓴맛은 나에게 ‘일하고 있다’는 삶의 한 조각을 상기시켰다. 감각은 언제나 의미를 동반한다. 나는 후설이 말한 ‘살아있는 현재’를 통해, 지금 이 커피의 맛과 공기의 향기를 통해 현재를 살고 있음을 아주 선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무엇 하나 특별하지 않은 순간이지만, 그 안에서 나의 존재는 물러서지 않고 세계 안에 단단히 서 있었다.

3. 오후: 익숙함이 주는 낯섦의 틈

오후 3시 무렵, 집중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화면 속 텍스트는 여전히 같았지만, 나는 자꾸만 다른 생각을 했다. 문장 하나를 읽다가, 나는 갑자기 멈춰, ‘내가 이 일을 왜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것은 피로 때문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세계가 익숙한 얼굴을 벗고 나를 낯설게 마주했기 때문이다. 이 순간은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내-존재’라는 개념과 맞닿아 있었다. 세계는 늘 내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갑작스럽게 그 거리를 노출한다.
책상 앞에서 몸을 조금 숙이고, 팔을 쭉 뻗었을 때, 내 팔의 관절이 저항하는 감각이 왔다. 그것은 단지 생리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지금 이 세계 속 시간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일깨워주는 신호 같았다. 불현듯 ‘오늘이 목요일’이라는 사실이 떠오르고, 나는 시간의 흐름을 머릿속에서 다시 배열했다. 현재는 항상 ‘지금’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과거의 잔재와 미래의 예감으로 구성된 살아 있는 구조다. 오후의 불안정한 집중력 속에서, 나는 ‘지금’을 구성하기 위해 과거를 호출하고 미래를 상상하며 나 자신을 다시 만들어내고 있었다.

4. 밤: 고요 속에서 나를 정리하는 시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이어폰을 끼지 않은 채 걸었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신호등이 깜빡이는 불빛, 멀리서 들리는 기침 소리,이것이 내 하루의 끝자락에 와 있다는 실감을 더해줬다. 나는 메를로퐁티가 말한 ‘살(flesh)의 감각’, 즉 세계와 몸이 맞닿은 그 경계선에서 살아 있는 느낌을 다시금 되새겼다. 집에 도착해 불을 끄고 누웠을 때, 나는 하루의 수많은 감각들을 내 몸속에서 정리하고 있었다.
‘오늘은 무엇이 나를 웃게 했지?’, ‘언제 집중을 잃었지?’, ‘언제 조금 외로웠지?’ 이런 질문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나의 의식이 나 자신에게 열리는 운동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라,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구성하고 다시 살아내는 존재임을 느꼈다. 이 하루의 끝은 닫힌 시간이 아니라, 다시 나를 이어가기 위한 열린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 나는 단지 잠드는 것이 아니라, 내일도 이 세계를 또다시 살아낼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5. 하루를 산다는 것은 감각과 의미를 반복해 구성하는 일이다

나는 하루를 끝내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하루를 ‘살아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그 감각은 단순히 시간이 흘렀다는 뜻이 아니라, 아침의 빛, 점심의 온도, 오후의 숨소리, 저녁의 고요함, 그 모든 것들이 내 안에 체험으로 차곡차곡 쌓였다는 자각에서 온다. 나는 살아가는 동안 한순간도 세상과 떨어져 있지 않았고, 그 순간마다 몸과 감정과 의식이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 하루는 어제와 같지도 않았고, 내일과도 같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하루를 살아낸 감각은 오직 나만의 것이며, 이 세계 안에서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깨어 있었는지를 말해주는 고유한 경험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현상학은 멀리 있는 철학이 아니라, 나의 체험을 낯설게 바라보는 연습이다. 나는 익숙했던 하루를 이렇게 다시 읽어내는 과정을 통해, 내가 어떤 식으로 세계에 몸을 두고, 시간을 따라 흐르며, 감각을 통해 존재하고 있었는지를 되새긴다. 결국 나의 하루는 시간이 흘러가는 일이 아니라, 감각이 쌓이고 의미가 구성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인식하는 지금 이 순간, 나는 단지 하루를 산 것이 아니라, 한 존재로서 하루를 ‘의식하며 살아냈다’는 실존의 흔적을 남긴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