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상학

존재론과 현상학의 교차점– ‘존재’는 어디에서 드러나는가?

1. 존재론의 고전적 문제: ‘무엇이 존재하는가?’에서 ‘존재란 무엇인가?’로

존재론(Ontology)은 철학의 가장 오래된 분야 중 하나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철학은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에 두어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를 ‘있는 것’으로 정의하고, 사물들의 본질, 특성, 변화를 설명하려 했다. 이처럼 고전적 존재론은 사물의 본성, 분류, 구조, 존재 조건에 관한 탐구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존재론은 대체로 객관적이고 외부적인 존재에 초점을 두는 방식이었다. 즉, 존재는 독립된 실체로 전제되었고, 인간이 그것을 인식하는 방식은 부차적인 문제로 다뤄졌다. 근대 철학에서 칸트는 이 구조를 비판하며 ‘존재가 인식의 조건에 의해 매개된다’고 주장했지만, 여전히 존재론은 인식론의 부속처럼 다뤄졌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등장한 현상학은 존재론을 다시 근본적으로 질문하기 시작한다. 현상학은 단지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존재가 나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 ‘나는 어떻게 존재를 경험하는가’라는 새로운 물음을 던진다. 이러한 접근은 존재론과 현상학이 만나는 철학적 교차점의 출발이 된다.

존재론과 현상학의 교차점– ‘존재’는 어디에서 드러나는가?

2. 후설: 존재 이전에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을 묻다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은 존재를 직접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존재가 어떻게 의식에 나타나는지를 분석하는 작업에 더 중점을 둔다. 그는 모든 철학은 ‘현상으로 돌아가라’는 명제로부터 출발해야 하며, 세계는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 ‘드러나는 방식’으로서 존재한다고 보았다.

후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존재가 어떻게 드러나는가’, 즉 현상으로서의 존재다. 그는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를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의식에 특정한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의식과 존재의 관계 구조, 즉 지향성(intentionality)을 통해 현상학은 존재에 대한 철학을 경험의 기반에서 재구성한다.

이때 존재는 더 이상 독립된 실체로서가 아니라, 의식의 지평 속에서 드러나는 의미의 구조가 된다. 예를 들어, ‘의자’라는 물건은 단순히 물리적인 대상이 아니라, 앉기 위한 대상, 기억이 담긴 대상, 미적으로 해석되는 대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의식에 나타난다. 후설은 바로 이 ‘의미 생성의 구조’에 주목하며, 존재론을 인식론이나 논리학의 하위 영역이 아니라, 현상의 탐구를 통해 새롭게 구성되는 철학의 중심 주제로 가져온다.

3. 하이데거: 존재를 묻는 방식 자체를 현상학으로 바꾸다

후설의 제자였던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존재론과 현상학의 교차점을 본격적으로 확장한 철학자다. 그는 후설의 방법론을 이어받으면서도, 그 방향을 ‘존재 자체를 묻는 철학’으로 전환시켰다. 그의 대표작 『존재와 시간』은 존재론을 다시 철학의 중심에 세우려는 시도이자, 존재를 경험하는 인간, 즉 ‘현존재(Dasein)’의 분석을 통해 존재 자체를 드러내려는 기획이다.

하이데거는 존재론이 수천 년 동안 존재자(존재하는 것들)에만 집중했으며, 정작 ‘존재’라는 개념 자체는 제대로 질문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그는 존재를 단지 객관적 실체나 속성으로 보지 않고, 드러남, 나타남, 펼쳐짐의 사건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는 현존재인 인간의 세계-내-존재 구조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철학은 후설의 현상학을 존재론적 방향으로 확장시키며, ‘존재가 나타나는 현상’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틀을 마련한다. 다시 말해, 하이데거에게 존재란 인간의 실존적 경험 속에서 드러나는 시간적 구조이며, 그 드러남을 해석하는 일이 곧 존재론적 사유가 된다. 이때 현상학은 단순한 의식 분석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드러내는 철학적 방법론으로 변화한다.

4. 현상학 이후의 존재론: 경험, 신체, 세계의 관계로 확장되다

하이데거 이후, 모리스 메를로퐁티(Merleau-Ponty)는 존재와 현상학의 관계를 ‘신체’와 ‘지각’의 철학으로 확장했다. 그는 인간이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이 단지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신체적 감각과 지각을 통해 세계와 얽혀 들어가는 방식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메를로퐁티에게 있어 존재란 ‘나에게 주어진 어떤 대상’이 아니라, 내가 살아 있는 몸으로 느끼고, 만지고, 반응하는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즉, 존재는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이며 감각적이고, 항상 변화하는 사건이다.

이런 관점은 현상학을 단지 인식론의 한 갈래로 두지 않고, 존재론적 탐구의 실질적 방법으로 자리 잡게 한다. 오늘날에도 존재론은 단지 철학자들의 주제가 아니라, 심리학, 인지과학, 예술, 건축, 인공지능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 중심의 존재 탐구’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현상학은 ‘존재는 어떻게 인식되는가’가 아니라, ‘존재는 어떻게 살아지는가, 체험되는가, 의미화되는가’를 묻는다. 이 질문은 과거의 형이상학이 놓쳤던 존재의 리듬과 맥락을 되찾게 만든다.

마무리하며: 존재는 멀리 있지 않다. 지금, 나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존재론과 현상학이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통찰을 얻게 된다. 존재는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며, 나와 세계가 만나는 이 경험, 이 순간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라는 점이다. 후설은 존재가 의식 속에서 드러나는 방식을 분석했고, 하이데거는 존재가 드러나는 사건 자체를 문제 삼았으며, 메를로퐁티는 그 드러남이 감각과 신체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현상학은 그렇게 존재에 대한 철학을 더 이상 멀리 있는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닌, 살아 있는 경험의 중심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존재론은 현상학을 통해 추상적 사유가 아닌 체험적 탐구의 길로 방향을 틀었다.

결국 존재론과 현상학의 교차점은 우리가 ‘존재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에서 ‘존재를 어떻게 경험하는가’로 질문을 전환시킨 자리이며, 이 전환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철학적 여정의 출발점이다.